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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프랑스 파리 1대학 (Panthéon Sorbonne) 박사과정 2년차에 접어든 변호사 김서현입니다. 파리에서 한국 법무법인의 일을 원격으로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고 있고, 2년 만에 한국에 잠깐 나왔습니다. 서울에서는 프랑스 박사과정 세미나에 ZOOM 으로 참석하며,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이미 이후에 전개될 세상을 살았다고나 할까요? 조금 특별한 삶과 상황에 대해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제가 살아 온 삶을 우리 여변 선후배님들과 이 자리를 통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자유로운 영혼, 김서현 변호사

-오십대 중반 어느날 훌쩍 프랑스로 떠나,

소르본 법대 박사과정을 밟기까지  ①회-

 

 

#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작고한 미국 시인 메리올리브의 시 “휘파람부는 사람”에 나온 위 시구는, 내가 내 삶을 설명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하는 아포리즘이다. 시인의 통찰력은 너무도 명료하고 간결하게 우주와 삶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우주의 숨겨진 비밀을 하나씩 열어 나간다.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질문이 많은가!

 

1. 나에 대한 숱한 질문 끝에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수많은 질문들을 안고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질문이 많은 나는 항상 이질적 존재였다. 난 우주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수많은 질문들을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살아왔다. 존재에 대한 숱한 철학적 질문들 속에 고3병을 앓던 나는,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감기를 앓는 국제정치 역학을 알기 위해,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정치학을 하면서, 경제학 수업도 많이 들었지만, 사회과학만으로는 인간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간존재,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제대로 된 사회과학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졸업 후 나는 대학원에 가서 인문학을 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알고 싶다는 지적욕구로 내린 결정이다. 철학과 심리학, 역사학 등이 모두 문학에 수렴된다는 나름의 판단으로 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현대시를 전공하였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 존재이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나의 언어는 나의 세계이다. 문학비평 용어를 익히며 인문학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비로소 내 안에 펼쳐졌다. 몇 년간의 인문학 공부를 통해,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여전히 깊이를 모르는 바닷속을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20대 10년을 청춘의 열병을 앓으며, 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바다 속에서 관념적인 시간을 보냈다. 재수와 휴학을 거치고, 놀며 쉬며 공부하느라 30살 여름 대학원을 졸업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교수님께서 “교수자리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요즘은 그 하늘에 별마저 없다.”고 하셨다.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문학박사가 되어본들 사치한 자기만족은 될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난생 처음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 직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하루 종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묻고,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한 달 이상을 물은 결과, 나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법학은 아주 재미있었다. 질문이 많은 나는 법대 과목 청강을 하면서도, 신림동 학원을 다니면서도 시험과는 별 상관없는 질문들을 참 많이 했다. 교수님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연구해서 그 다음에 따로 불러 답해주셨다. 신림동의 명강사는 이렇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시험에 안 된다 타박하고 차라리 학문을 하라고 하셨다. 남이야 뭐라던 나는 내 방식대로 학문을 하듯 시험공부를 하고, 두 바퀴를 돌아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세잔 아뜰리에 / 세잔이 멀리 보이는 생빅트와르 산을 매일 그렸던 언덕

 

2. 변호사로서 내가 빛을 발했던 순간들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나이는 있는 상태여서 나는 바로 개업을 하였다. 처음 변호사가 되고자 결심하고 시험공부를 시작하였을 때, 변호사가 되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많은 일을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초심은 그랬다. 무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었지만, 크게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큰 정의감을 가지고 투쟁하기보다는, 따뜻하게 사회의 구석진 곳을 보듬고 빛을 비추고 싶었다. 결국은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긴 성찰 끝에 깨달았기 때문이다.(물론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멀다. 지금 어디쯤 왔을까...나는 아직 그 길을 걷고 있다.)

 

  변호사 1, 2년차에는 많은 국선 형사사건을 맡아 변론을 했다. 법정에서 형사 수석부장님으로부터 정말 변론을 잘 한다는 칭찬도 듣고, 그 해 제 1회 우수국선변호인상을 수상했다. 서울역 앞 노숙자부터 이혼당한 대기업 재벌 사모님 사건까지 맡아, 인간의 애환과 아픔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탐구로 20대 10년을 보낸 덕분인지, 변호사로서 나의 달란트는 조정에서 나타났다. 한 때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조정의 달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는 조정이 사회행복지수를 높이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조정에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인생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이런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일이 나에게도 고통으로 다가왔다. 특히 가족 간의 분쟁을 지켜볼 때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생겼다. 3번씩 조정기일을 잡으며, 서로 양보시키고, 이해시키고 최종 합의에 이르면 조정실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그렇게 나타났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열정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변호사로서 전문분야를 정하려 오래 고민 했으나, 딱히 나를 사로잡는 분야가 없었고, 어느 분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specialist’가 아니라 ‘generalist’로서 다양한 분야의 사건을 다 처리해왔다. 비교적 행정사건에서 큰 성과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