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LA 21호 (2021.5.) - 회원코너]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자유로운 영혼, 김서현 변호사 -오십대 중반 어느날 훌쩍 프랑스로 떠나, 소르본 법대 박사과정을 밟기까지 ①회-

by (사)한국여성변호사회 posted May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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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프랑스 파리 1대학 (Panthéon Sorbonne) 박사과정 2년차에 접어든 변호사 김서현입니다. 파리에서 한국 법무법인의 일을 원격으로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고 있고, 2년 만에 한국에 잠깐 나왔습니다. 서울에서는 프랑스 박사과정 세미나에 ZOOM 으로 참석하며,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이미 이후에 전개될 세상을 살았다고나 할까요? 조금 특별한 삶과 상황에 대해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제가 살아 온 삶을 우리 여변 선후배님들과 이 자리를 통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자유로운 영혼, 김서현 변호사

-오십대 중반 어느날 훌쩍 프랑스로 떠나,

소르본 법대 박사과정을 밟기까지  ①회-

 

 

#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작고한 미국 시인 메리올리브의 시 “휘파람부는 사람”에 나온 위 시구는, 내가 내 삶을 설명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하는 아포리즘이다. 시인의 통찰력은 너무도 명료하고 간결하게 우주와 삶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우주의 숨겨진 비밀을 하나씩 열어 나간다.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질문이 많은가!

 

1. 나에 대한 숱한 질문 끝에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수많은 질문들을 안고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질문이 많은 나는 항상 이질적 존재였다. 난 우주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수많은 질문들을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살아왔다. 존재에 대한 숱한 철학적 질문들 속에 고3병을 앓던 나는,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감기를 앓는 국제정치 역학을 알기 위해,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정치학을 하면서, 경제학 수업도 많이 들었지만, 사회과학만으로는 인간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간존재,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제대로 된 사회과학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졸업 후 나는 대학원에 가서 인문학을 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알고 싶다는 지적욕구로 내린 결정이다. 철학과 심리학, 역사학 등이 모두 문학에 수렴된다는 나름의 판단으로 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현대시를 전공하였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 존재이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나의 언어는 나의 세계이다. 문학비평 용어를 익히며 인문학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비로소 내 안에 펼쳐졌다. 몇 년간의 인문학 공부를 통해,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여전히 깊이를 모르는 바닷속을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20대 10년을 청춘의 열병을 앓으며, 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바다 속에서 관념적인 시간을 보냈다. 재수와 휴학을 거치고, 놀며 쉬며 공부하느라 30살 여름 대학원을 졸업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교수님께서 “교수자리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요즘은 그 하늘에 별마저 없다.”고 하셨다.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문학박사가 되어본들 사치한 자기만족은 될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난생 처음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 직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하루 종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묻고,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한 달 이상을 물은 결과, 나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법학은 아주 재미있었다. 질문이 많은 나는 법대 과목 청강을 하면서도, 신림동 학원을 다니면서도 시험과는 별 상관없는 질문들을 참 많이 했다. 교수님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연구해서 그 다음에 따로 불러 답해주셨다. 신림동의 명강사는 이렇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시험에 안 된다 타박하고 차라리 학문을 하라고 하셨다. 남이야 뭐라던 나는 내 방식대로 학문을 하듯 시험공부를 하고, 두 바퀴를 돌아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세잔 아뜰리에 / 세잔이 멀리 보이는 생빅트와르 산을 매일 그렸던 언덕

 

2. 변호사로서 내가 빛을 발했던 순간들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나이는 있는 상태여서 나는 바로 개업을 하였다. 처음 변호사가 되고자 결심하고 시험공부를 시작하였을 때, 변호사가 되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많은 일을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초심은 그랬다. 무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었지만, 크게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큰 정의감을 가지고 투쟁하기보다는, 따뜻하게 사회의 구석진 곳을 보듬고 빛을 비추고 싶었다. 결국은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긴 성찰 끝에 깨달았기 때문이다.(물론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멀다. 지금 어디쯤 왔을까...나는 아직 그 길을 걷고 있다.)

 

  변호사 1, 2년차에는 많은 국선 형사사건을 맡아 변론을 했다. 법정에서 형사 수석부장님으로부터 정말 변론을 잘 한다는 칭찬도 듣고, 그 해 제 1회 우수국선변호인상을 수상했다. 서울역 앞 노숙자부터 이혼당한 대기업 재벌 사모님 사건까지 맡아, 인간의 애환과 아픔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탐구로 20대 10년을 보낸 덕분인지, 변호사로서 나의 달란트는 조정에서 나타났다. 한 때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조정의 달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는 조정이 사회행복지수를 높이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조정에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인생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이런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일이 나에게도 고통으로 다가왔다. 특히 가족 간의 분쟁을 지켜볼 때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생겼다. 3번씩 조정기일을 잡으며, 서로 양보시키고, 이해시키고 최종 합의에 이르면 조정실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그렇게 나타났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열정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변호사로서 전문분야를 정하려 오래 고민 했으나, 딱히 나를 사로잡는 분야가 없었고, 어느 분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specialist’가 아니라 ‘generalist’로서 다양한 분야의 사건을 다 처리해왔다. 비교적 행정사건에서 큰 성과들이 있었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세잔 아뜰리에

 

 

#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자유로운 영혼-나답게 산다는 것

 

1. 나답게 산다는 것 : 인생은 나만의 요리 만들기

 

  나는 나답게 살기로 이른 나이에 결정했다. 인생은 어쩌면 요리하기와 같은지도 모른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나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을 다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비유이다. 마치 인생은 각자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재료를 받아서, 그 재료로 자기만의 요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누구는 스테이크, 누구는 해물탕, 누구는 된장찌개나 순두부찌개 재료를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조건이다. 물론 받은 식재료로 3~4가지 요리는 변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타인과 비교하며 곁눈질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자기 인생에 없는 재료를 한탄하며 사는 사람이다. 각자 타고난 환경과 유전자, 재능,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레시피를 한국에 전해주었던 연어조림

 

 

  어렸을 때는 나도 남들의 삶이 부러웠다, 특히 젊은 부모를 둔 단출한 가정의 평범한 친구가 참 부러웠다.(물론 지금은 이 세상 어느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다. 난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아버지 50세에 날 낳으셨고(55세에는 내 동생을 낳으셨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엔 회갑을 훌쩍 넘기신 연세셨다.(가장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 연세와 비슷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사별하시고, 재혼 하셔서 우리 딸 다섯을 낳으셨다. 난 그 중 넷째 딸이다. 아버지 쪽 언니, 오빠 4명, 엄마 쪽 언니 1명 합하면, 전체 10명 중 내가 9번째이다.(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은 얼마나 불었을까?) 아버지는, 사별하신지 1년도 안돼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니신 엄마를 보시고, 첫눈에 반해서 재혼을 하셨다. 엄마는 참 예쁘고 기품이 있으셨다. 14살 어린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실로 엄청 났다. 애지중지 그 자체였다.(나는 아직 이런 사랑을 베풀어 줄 남자를 못 만나, 혼자 산다.) 한학을 하시고, 시조를 곧잘 읊으시던 아버지는 나에게도 명심보감을 그토록 읽으라 하셨건만, 난 아직도 명심보감을 읽지 않았다. 황희정승 후손이셨던 엄마는 우리에게 양반가문의 자손은 어떠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젊은 나이에 사별하시고, 한평생 아버지 사랑 속에 편하게 사시려 재혼하셨지만, 내가 유치원 다닐 무렵 우리 집은 크게 사기를 당하고 가세가 기울었다. 부모님은 한평생 6~7가지 직업을 가지셨던 것 같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내가 어찌 철학자적 소양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참 건강하고 밝다고 놀라시는 분들이 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다채로운 내 삶의 조건들이 나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었는지... 오히려 진정 감사하다.) 천성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다지 결핍을 모르고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과 부모님의 유전자를 타고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내 인생, 내가 선택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진 식재료를 가지고 나는 무슨 요리를 맛있게 만들 것인가. 먼저 나에게 주어진 재료로 무슨 요리를 만들 수 있을지 빨리 상황파악을 했다. 그 결과 나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아마도 퓨전 창작요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퓨전은 전형적인 요리를 만들기엔 부족한 재료가 있을 경우, 다른 재료를 섞어 나오기도 한다. 나는 내 인생의 조건들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는 길, 세상이 정해둔 시간표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걸어왔다. 천천히 인생을 음미하면서 여행하듯 인생길을 걷다가, 언젠가부터 마침내 좁은 문, 좁은 길에 들어섰다.

 

 

파리의 어느 골목 앞 대문

 

밀라노 근교 코모(Como) 호수, 김수연 영국& 이태리 변호사와 함께,

 

2.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자유로운 영혼

 

  많은 이들이 나를 일컬어 “자유로운 영혼”이라 한다. 천성이 어디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니, 자유로운 영혼은 맞는다. 어느 조직이든 깊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발적 아웃사이더 기질이 농후한 나는 바깥에서 관조하는 것을 더 좋아 한다.(젊은 날의 이상은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지점에서 나다운 균형을 찾고 있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얻는 사람이다 보니, 평생 재미보다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현상 너머의 본질,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시에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탐구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아는 만큼 神을 알 수 있고, 자신을 아는 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탐구하면서, 나 자신의 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내가 처한 환경, 조건들에 세상은 우호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휘기픈남간 바람에 아니 뮐쌔’ 그렇다, 어떠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나는 깊은 뿌리가 필요했다. 나의 시선은 나의 내면을 깊이 응시한다.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내공일 수도 있고, 생명력일 수도 있고,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랑일 수도 있다. 결국은 그 깊은 뿌리가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진짜에는 아우라가 있다. 나는 아우라가 있는 삶을 추구한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Torse 공원 내 book box

 

 

# 갈 바를 모르고 길을 떠나다. : 남프랑스 Aix-en-Provence.
 
1.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정을 오래 참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모든 일에 싫증을 자주 냈다. 변호사로 만 15년 일한 2018년 2월 어느 날, 나는 두 개의 큰 트렁크를 들고,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로 떠났다. 물론 2017년 7월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사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긴 휴식이 필요했다. 재충전 없이 계속 변호사 업무를 지속하기는 힘들었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안주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전망 좋은 사무실 내 방을 참 좋아했고, 나름 안락했고, 행복했다. 그렇지만 무언가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변화를 갈망하는 내면의 울림을 무시할 수 없었다. 2017년 여변 송년모임에서 나는 꽤 비장한 각오를 말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내가 이제 프랑스로 떠나면 다시 돌아올지 말지, 다시 돌아온다면 변호사를 계속 할지 말지 모든 것이 미정이고, 나는 국문과 대학원을 마치고 사법시험 볼 결심을 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를 갈망하며 떠난다.”고 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나는 겁 없이 떠났고, 무사히 내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하고 안착했다. 실패도, 성공도, 이 나이쯤 되면 모든 것이 습관이다. 새롭게 도전하고, 성취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나에게는 이런 떠남도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나처럼 어느날  훌쩍 프랑스로 날아온 일본인 친구 미도리와 함께

 

* 프랑스로 떠난 이후인 [#갈 바를 모르고 길을 떠나다. : 남프랑스 Aix-en-Provence. 2.]부터는 다음 6월호에 계속됩니다.
* 각주가 포함된 전체 원고는 파일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김서현 변호사

 

 

사법연수원 32기
법무법인 비전 파트너 변호사.
(전)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위원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감사
 

 

담당 양진영 변호사 Ⓒ (사)한국여성변호사회 뉴스레터발간위원회

 

 

* 회원칼럼은 작성자의 의견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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